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런 버와 알렉산더 해밀턴의 결투 (문단 편집) == 배경 및 전개 == 알렉산더 해밀턴과 에런 버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해밀턴은 버를 가리켜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인물이라고 버를 비난했으며 버가 권력을 잡으면 미국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다. 해밀턴은 워낙 그 성격때문에 본인이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고, 따라서 해밀턴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이하게 해밀턴은 제퍼슨도 매우 싫어했지만 제퍼슨은 해밀턴의 정치적인 견해와 주장을 받아들이지는 못했어도 어느 정도는 그를 이해했기 때문에 버와 달리 해밀턴을 크게 적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해밀턴이 정말 인생을 걸 정도로 싫어했던 남자가 바로 애런 버였다. 해밀턴과 버의 사이는 버가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면서 제퍼슨파에 합류해 해밀턴의 장인을 선거에서 이기면서 틀어진 것으로 본다. 버는 당대에도 능력은 있던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었기에 해밀턴은 버가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으로 간주하고 버를 큰 위협으로 여기면서 사사건건 버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버도 맞불을 놓으면서 둘의 사이는 점점 악화되었다. 게다가 워싱턴 행정부 당시에 버는 검찰총장 위치에 있었기에 정적들의 약점을 알기 쉬운 직책을 가지고 있었고 해밀턴의 장관직을 끝장낸 섹스 스캔들 당시에도 버가 당시 해밀턴과 관계를 가진 여성의 변호인으로 활동하자 버가 해밀턴의 섹스 스캔들에 관여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이 나올 정도였다. 이렇게 상호간에 폭로전과 흑색선전을 난무하면서 둘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결국 해밀턴은 '''단지 버가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토머스 제퍼슨]]을 지지'''[* 원래 해밀턴은 대표적인 연방주의자로 정치적으로는 [[존 애덤스]]와 성향이 비슷했다. 제퍼슨이 반연방주의자의 수장이었고 해밀턴과 제퍼슨이 엄청나게 키보드 배틀을 벌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독한 행동이었던 것.]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연방주의자 표가 제퍼슨에게 몰리면서 애런 버는 2등을 해 부통령 지위에 머물렀다. 지금은 대통령 후보가 부통령 후보를 지명하여 선거전에 함께 뛰어들지만 당시에는 제도상 대통령 선거 결과 2위가 부통령직을 맡았다. 이 때 대선 결과는 선거인단 기준으로 토머스 제퍼슨 73표, 애런 버 73표, 존 애덤스 65표, 찰스 핀크니 64표였다. 원칙적으로는 존 애덤스와 핀크니처럼 대통령-부통령 표가 1표차 정도 나게 배분을 해야했는데[* 이 때문에 연방당에서는 "존 제이"라는 허수후보를 한명 더 세워서 여기에다가 1표를 던져준다.], '''뉴욕의 12표가 애런 버를 찍는 바람에''' 제퍼슨과 버의 득표가 동일해진 것. 결국 이 대선은 미국 하원으로 넘어갔고, 하원 투표에서 제퍼슨이 버를 앞섰지만 과반수를 얻지 못해 하원 2차 투표로 넘어간다. 하원 2차 투표는 각 주에서 하원의원 1명이라도 더 확보한 사람의 주로 넘어가는 것이었고, 동수로 투표결과가 나오면 무효가 된다. 여기서 과반수의 주를 확보해야 최종적으로 당선되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하원 투표를 하는데 제퍼슨 8주, 버 6주, 무효 2주로 또다시 결과가 안 나온다. 그래서 마지막 투표로 2차투표와 동일한 방식으로 재투표가 반복되었는데[* 여기서도 결론이 안 나면 대통령 선거가 무효화되고 재선거를 시행한다.], 대선이 무효화되어 재선거가 시행될 경우 '''정말 버가 당선될까봐''' 3차 투표 직전에 알렉산더 해밀턴이 제퍼슨을 지지해서 제퍼슨 10주, 버 4주, 무효 2주로 제퍼슨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당연히 버도 이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는데 해밀턴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버를 비난하는 편지를 쓰는 등 버를 계속 방해했다. 말이야 간단하지만 그 내용은 상당히 저열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은 뉴욕 주지사 선거를 바로 앞두고 벌어졌다. 해밀턴은 평소처럼 버에 대해서 '위험한 인간, 정권을 맡겨서는 안되는 인물'이라고 표현했고, 이를 신문보도로 접한 버는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부인, 아니면 즉각적인 사과'''(prompt and unqualified denial or an immediate apology)를 요구했다. 하지만 해밀턴의 대응은 버가 원하는 바에는 미치지 못했다. 결국 열받은 버는 해밀턴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해밀턴도 이에 응하면서 역사적인 결투가 시작된다. 현대에 이런 결투를 했다가는 살인, 폭행죄가 적용될 수도 있는 사안이지만 이 당시 이런 식의 결투는 사나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흔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결투에서 상대방을 죽이더라도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러시아의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과 프랑스의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 등이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유럽과 미국에서는 결투로 인한 인명사고가 빈번했다.] 그러나 당시 뉴욕 주는 결투를 금지했기 때문에 이들의 결투는 뉴욕 법을 적용받지 않는 곳에서 진행되어야 했다. 1804년 7월 11일 바로 강너머 [[뉴저지]] [[허드슨 강]] 근처에서 결투가 벌어졌다.[* 100%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다고 하지만 [[뉴저지]]의 허드슨 강가쪽이라고 한다. 추측되는 장소에는 기념비도 있다. 주변은 그냥 [[뉴욕]] 마천루가 멋지게 보이는 고급주택가.] 버의 총탄은 해밀턴의 오른쪽 골반을 뚫어 척추에 박혔고 결국 해밀턴은 결투 다음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버는 멀쩡했으며 쓰러진 해밀턴을 내려다 본 후 결투장을 빠져나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